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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대한민국 민주화를 바꾼 진실의 기록

나니데쓰까 2026. 6. 17. 12:15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7년 1월 15일 오후 3시 30분, 서울 시내 가판대에 쏟아져 나온 《중앙일보》 석간이 불티나게 팔려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짧은 2단 기사.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기사 한 줄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뒤흔드는 거대한 파문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전날인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朴鍾哲, 당시 21세)은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위치한 치안본부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경찰의 물고문 끝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경찰은 즉각 이 사건을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황당한 쇼크사로 발표하며 은폐를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살아남았습니다. 검찰 고위 관계자가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를 포착한 기자의 직관, 고문 흔적이 역력한 시신 앞에서 용기 있게 증언한 의사, 그리고 교도소 담장 안에서 바깥으로 전달된 손바닥만 한 쪽지 한 장. 이 세 가지가 없었다면 박종철의 죽음은 역사 속에 영원히 묻혔을 것입니다.

박종철의 죽음은 이후 1987년 6월, 수백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으며, 그해 6월 29일 노태우의 직선제 개헌 수용 선언을 이끌어 내는 역사적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스물한 살의 청년이 차가운 조사실에서 생을 마감한 그 비극적인 순간은, 역설적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본 글에서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전모를, 박종철의 생애부터 연행·사망 경위, 초기 은폐 공작, 진실 폭로의 과정, 재판 결과, 6월 항쟁과의 연결, 오늘날의 역사적 평가까지 체계적이고 정확하게 정리합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개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치안본부 대공분실 경찰 수사관들이 수배자의 소재 파악을 위해 대학생을 불법으로 연행하여 고문하다 사망케 한 국가 폭력 사건입니다. 사건 자체보다 더 큰 충격을 준 것은 이후 드러난 안기부·법무부·검찰·청와대 비서실이 총동원된 조직적인 은폐 공작이었습니다.

항목 내용

항목 내용
피해자 박종철 (朴鍾哲, 1965년 4월 1일생, 서울대 언어학과 84학번)
사망일 1987년 1월 14일
사망 장소 서울 용산구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
사망 원인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 (물고문)
연행일시 1987년 1월 13일 자정경
연행 명목 수배 중이던 박종운의 소재 파악
고문 가담 수사관 조한경·강진규·황정웅·반금곤·이정호 (총 5명)
경찰의 초기 발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 — 쇼크사 주장
최초 보도 《중앙일보》 1987년 1월 15일 석간 (신성호 기자)
은폐 주도 박처원 치안본부 5차장 및 관계기관대책회의 (안기부·법무부·내무부·검찰·청와대 비서실)
은폐 폭로일 1987년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
역사적 영향 1987년 6월 항쟁 및 6·29 직선제 개헌 선언의 직접적 도화선

이 사건은 단순한 경찰의 과잉 수사가 아닌, '각하 분부사항'이라는 대통령 지시 문서에 근거한 강압 수사 명령에 의해 발생하였고, 사후 국가 최고 기관들이 총동원된 조직적 은폐가 이루어진 국가 범죄적 성격을 지닙니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당시 정부가 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조작하였음을 공식 확인하였습니다.

박종철은 누구인가-생애와 학생운동

출생과 성장

박종철은 1965년 4월 1일 부산에서 부친 박정기와 모친 정차순 사이 2남 1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습니다. 형은 박종부, 누나는 박은숙입니다. 부산 서구 아미동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토성초등학교, 영남제일중학교, 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 고교 시절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얼굴이 하얗고 두꺼운 안경을 낀 차분하고 지적인 학생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 재수를 거쳐 1984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 입학 후 학생운동에 투신하여 1986년 언어학과 학생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학생운동과 구속 경력

박종철은 1986년 4월 11일 청계피복노동조합 합법성 쟁취대회 가두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받고 그해 7월 15일 석방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유기정학을 받아 학교생활이 곤란해졌으나, 출소 이후에도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서울대 대학문화연구회 소속이었으며, 수배 중이던 선배 박종운을 자신의 하숙집에서 만난 것이 결국 이 비극적 사건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사건 발생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한 살,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대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박종철이 남긴 편지

1986년 7월, 구속 수감 중이던 박종철이 쓴 편지의 한 구절은 오늘날 서울 관악구 박종철 거리의 벤치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 편지는 그가 단순한 운동권 학생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과 삶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한 청년이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사건 발생 배경-1987년 1월의 공안 정국

전두환 정권의 강압 수사 지시

1986년 10월 28일 건국대학교 항쟁 진압 이후, 전두환 정권은 '반제동맹당 사건' 등 공안 조작 사건들을 연이어 발표하며 공안 정국을 조성하였습니다. 당시 경찰 내부로는 '각하 분부사항'이라는 제목의 내부 문서가 하달되었는데, 그 핵심 내용은 "불가피하게 강압 수사를 무릅쓰더라도 조직의 배후를 잡아들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치안본부·안기부·보안사 등의 당국들은 경쟁적으로 공안 사범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하였으며, 사건 발생 전날인 1987년 1월 13일, 김종호 내무부 장관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격려 방문하여 당시 진행 중이던 공안 사건 수사에 속도를 내도록 직접 압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연행 경위

1987년 1월 13일 자정경, 박종철은 자신의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불법으로 연행되었습니다. 연행의 명목은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받고 있었던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박종운은 사건 엿새 전인 1987년 1월 8일에도 다른 동료와의 연락을 부탁하기 위해 박종철의 하숙집을 찾은 적이 있었으며, 경찰은 이 정황을 포착하고 박종철을 연행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어떠한 법적 근거도 없는 불법 연행이었습니다.

남영동 509호-고문과 죽음

고문의 실상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로 연행된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경찰 수사관들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습니다.

물고문은 피해자의 얼굴을 물이 담긴 욕조에 강제로 밀어 넣는 방식으로 행해졌으며, 이 과정에서 박종철의 목 부위가 욕조 턱에 눌려 질식이 발생하였습니다. 1987년 1월 14일 오전, 박종철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끝내 사망하였습니다.

사망 확인과 경찰의 첫 반응

오전 11시 45분경, 중앙대 용산병원 의사 오연상이 현장에 도착하여 검진하였을 당시 박종철은 이미 숨져 있었습니다. 현장에는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고, 박종철의 복부는 심하게 팽만한 상태였으며 폐에서는 수포음이 들렸습니다.

경찰은 14일 밤 즉각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시신을 화장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날 당직을 맡았던 안상수 검사가 지휘하는 검찰 측에서 최환 부장검사가 사체보존명령을 내려 화장을 저지하였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공간

남영동 대공분실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로, 이 건물은 연행된 피의자가 내부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설계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좁은 나선형 계단, 외부가 보이지 않는 창문 구조 등이 고문을 용이하게 하는 환경을 조성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현재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변모하여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경찰의 초기 은폐-"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황당한 거짓 발표

1월 16일, 강민창 당시 내무부 치안본부장이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는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하여 박종철 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졌고,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황당하고도 상징적인 거짓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국민들은 이 발표를 즉각 불신하였으나, 군사 독재 치하에서 공개적으로 반박의 목소리를 높이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고문 사실의 시인과 2인 은폐

기자회견 4일 후인 1월 19일, 강 치안본부장은 다시 특별 기자회견을 열어 "가혹행위"로 인한 사망을 마지못해 시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경찰은 고문 가담자를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2명만으로 한정하여 발표하고 두 사람을 구속하는 것으로 사건을 축소하려 하였습니다.

실제 고문 가담자는 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장, 이정호 경장을 포함한 총 5명이었습니다. 나머지 3명의 존재를 은폐하기 위해 구속된 2명에게는 거액의 금전이 지급된 것으로 이후 폭로되었습니다.

시신의 강제 화장과 증거 인멸

부검을 마친 박종철의 시신은 가족의 동의도 없이 벽제 화장터에서 강제로 화장되었습니다. 1987년 1월 16일 아침 화장된 그의 유해는 임진강에 산골되었습니다. 이는 물고문의 흔적을 담은 결정적 물증을 영구히 소멸시키기 위한 조직적 증거 인멸 행위였습니다.

사건 수습을 위해 임명된 정호용의 발언

사건 수습을 위해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정호용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며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였습니다. 그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특전사령관으로 시민 학살의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되던 인물이었기에, 이 발언 역시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진실의 추적-언론.의학.종교계가 맞선 권력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의 단서 포착

박종철 사망 당일인 1월 14일, 중앙일보의 신성호 기자는 대검찰청을 출입하던 중 한 검찰 간부가 "경찰, 큰일 났어"라고 무심코 내뱉는 한마디를 포착하였습니다. 직감적으로 중요한 사안임을 감지한 신 기자는 즉각 취재에 나섰고, 1987년 1월 15일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2단 기사를 석간에 단신으로 실었습니다. 이 기사는 국내외 언론으로 퍼지며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의사 오연상의 용기 있는 증언

현장에 출동하였던 의사 오연상의 증언은 물고문 의혹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1월 17일 동아일보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제가 대공분실에 처음 갔을 때는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습니다. 박 군은 복부 팽만이 심했고, 폐에서는 수포음이 들렸습니다."

이 증언은 물고문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며, 모든 언론이 이 내용을 대서특필하였습니다. 또한 오연상은 경찰이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이 아닌 병원에서 숨졌다고 조작하려는 음모를 알아채고, 중앙대학교병원 측에 시신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요청하는 등 적극적인 대응을 펼쳤습니다.

부검의 황적준 박사의 결정적 보고서

1월 15일 오후 6시가 넘어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이 실시되었습니다. 부검 결과 박종철의 시신에서는 온몸의 피멍, 엄지와 검지 간 출혈 흔적, 사타구니·폐 등의 훼손, 복부 팽창, 폐의 수포음 등 물고문의 명확한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는 군부와 경찰의 협박과 회유를 물리치고 1월 17일 "박종철 군의 사인은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라는 공식 보고서를 작성하고 언론에 발표하였습니다. 경찰의 쇼크사 발표를 정면으로 뒤집은 이 발표로,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숨졌다는 사실은 이제 숨길 수 없는 여론의 대세가 되었습니다. 황 박사는 1년 뒤 부검 과정에서 받았던 경찰의 회유와 협박 내용을 담은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하기도 하였습니다.

은폐 조작의 전모-교도소 담장을 넘어온 쪽지

담장 안에서 시작된 진실의 여정

1987년 1월 19일, 고문 가담자로 구속된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는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들만 구속된 것에 불만을 품고, 실제로는 고문 가담자가 5명이라는 사실을 감방에서 소리쳐 댔습니다.

이 사실을 인근 방에서 우연히 듣게 된 것은,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으로 시국사건으로 수감 중이던 재야 인사 이부영이었습니다. 동아일보 해직 기자 출신인 이부영은 교도관에게 문의하여 "박종철 사건이 은폐 조작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쪽지의 전달 경로 — '알려지지 않은 영웅들'

이부영은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문서를 은밀하게 작성하여 외부로 전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쪽지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거쳐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전달순서 인물 역할
1단계 안유 (영등포구치소 보안계장) 이부영에게 은폐 사실 최초 귀띔
2단계 이부영 (수감 중인 재야 인사) 사건 전말을 쪽지에 기록
3단계 한재동 (교도관) 쪽지를 교도소 외부로 반출
4단계 전병용 (퇴직 교도관) 쪽지를 재야 운동가에게 전달
5단계 김정남 (재야 운동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
6단계 함세웅 신부 → 김승훈 신부 폭로 결정 및 공개 발표

이 전달에 관여한 교도관들의 신원은 혹시 모를 불이익을 우려하여 비밀에 부쳐지다가, 모두 정년퇴직한 2012년이 되어서야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이부영은 훗날 인터뷰에서 이들을 "알려지지 않은 영웅"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1987년 5월 18일 — 김승훈 신부의 역사적 폭로

1987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조작 전모를 공개적으로 폭로하였습니다.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 등 대공 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조작하였고, 실제 고문 가담 경관이 2명이 아니라 모두 5명이라는 사실, 그리고 안기부·법무부·내무부·검찰·청와대 비서실과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참여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은폐·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하였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 폭로는 전두환 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주었습니다. 5월 22일 동아일보는 경찰의 사건 은폐와 가담자 축소 사실의 구체적 내용을 처음으로 대서특필하였고, 국민들의 분노는 이제 임계점을 훌쩍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재판 결과-고문 경찰관들의 처벌과 관련자 행적

1심 판결 (1987년 7월 4일)

1987년 7월 4일,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10부(선진곤 부장판사)는 고문 가담 경찰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고하였습니다.

피고인 직급 선고형량
조한경 경위 징역 15년
강진규 경사 징역 15년
반금곤 경장 징역 8년
황정웅 경위 징역 7년
이정호 경장 징역 5년

이 판결은 형사법상 중요한 법리적 선례이기도 합니다. 재판부는 공무원 중 하급자는 상급자의 적법한 명령에만 복종할 의무가 있으며, 고문치사와 같이 명백히 위법·불법한 명령의 경우 이를 따라야 할 의무가 없다는 원칙을 확인하였습니다.

은폐 조작을 주도한 박처원 치안감 등 대공 간부 3명도 사건 폭로 이후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일부 피고인에 대해서는 "경찰에 봉직하면서 대공 분야에 헌신하였고, 유죄 판결만으로도 공로에 치명상을 입게 된 점"을 참작하는 내용의 판결문이 작성되어 집행유예가 선고되기도 하였습니다.

관련 인물들의 이후 행적

이 사건과 관련된 주요 인물들의 이후 행적은 대한민국 사회에 적지 않은 논란을 남겼습니다.

  • 박종운 (소재 파악의 대상이 된 선배): 이후 한나라당 지구당 위원장을 지냈고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하여 논란을 빚었습니다.
  • 신창언 검사 (수사 지휘): 이후 신한국당(현 국민의힘의 전신) 추천으로 헌법재판관을 역임하였습니다.
  • 박상옥 검사 (담당 검사): 2015년 박근혜 정권에서 대법관 후보자로 지명되었으나, 사건 은폐 사실을 알고도 수사를 확대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논란을 빚었습니다.
  • 안상수 검사 (당직 검사): 한나라당 당 대표를 역임하였으며 창원시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사건 당시 은폐 관여 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 당시 경질된 고위 인사들: 전두환 정권은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안기부장, 정호용 내무부 장관, 김성기 법무부 장관, 서동권 검찰총장, 이영창 치안본부장 등을 문책 인사 형태로 경질하는 개각을 단행하였으나, 이들은 공직 은퇴 후 실질적인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6월 항쟁으로의 연결-한 청년의 죽음이 민주주의를 바꾸다

박종철 사건 이후 항쟁의 전개

박종철의 사망과 은폐 폭로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요 사건의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날짜 주요사건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남영동 509호에서 사망
1987년 1월 15일 《중앙일보》 최초 보도
1987년 1월 16일 강민창 치안본부장, "탁 치니 억" 거짓 발표
1987년 1월 19일 경찰, 가혹행위 시인 — 조한경·강진규 2명만 구속 (3명 은폐)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4·13 호헌 조치 (개헌 논의 일방 중단) 발표
1987년 5월 18일 김승훈 신부, 5인 가담 및 조직적 은폐 조작 전모 폭로
1987년 6월 9일 연세대 이한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의식불명
1987년 6월 10일 전국 22개 도시에서 '박종철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 개최 — 6월 항쟁 본격화
1987년 6월 29일 노태우, 6·29 선언 (대통령 직선제 개헌 수용)
1987년 7월 5일 이한열 사망
1987년 10월 제6공화국 헌법 국민투표 통과
1987년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 (직선제) 실시

6월 10일 국민대회와 이한열

은폐 폭로 이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어 6월 10일에 대규모 규탄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대회 하루 전인 6월 9일, '연세인 결의대회' 시위 현장에서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전투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의식불명에 빠졌습니다. 이한열은 7월 5일 끝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박종철의 고문 사망과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 사망이라는 두 비극이 겹치면서, 6월 항쟁의 열기는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습니다.

6·29 선언 — 스물한 살 청년이 일군 민주주의

6월 항쟁의 결과로 1987년 6월 29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 수용 등을 담은 6·29 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스물한 살의 대학생 박종철이 냉혹한 고문실에서 생을 마감한 지 불과 5개월 만의 일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은, 그 어떤 역사적 평가보다도 무겁게 남아 있습니다.

역사적 평가와 기억-박종철을 기리며

사후 추모와 기념 사업

연도 내용
1989년 박종철기념사업회 창립
2001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 인정, 서울대 명예 학사학위 수여
2003년 박종철인권상 제정 및 시상 시작
2018년 1월 서울 관악구 대학동 대학5길에 '박종철 거리' 조성
2018년 3월 문무일 검찰총장, 박정기 씨 방문 및 공식 사과 (현직 검찰총장 최초 과거사 사과)
2018년 7월 28일 부친 박정기 씨 별세 — 문재인 대통령 애도 표명
2020년 6월 서울대 인근 박종철 거리에 동상과 벤치 설치
  • 유족과 학생운동 동지들은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가묘를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습니다.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 추모비와 흉상이 건립되어 학내 '민주화의 길'의 한 지점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영화 '1987'과 대중문화적 재조명

연도 매체 내용
2017년 영화 《1987》 개봉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전모를 극화, 당해 흥행 1위
2022년 3월 24일 SBS 《꼬꼬무》 '1987, 종철이와 비둘기들'이라는 제목으로 방송

2017년 개봉한 영화 '1987'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소재로 삼아, 검사 최환, 교도관 한재동, 기자 신성호, 의사 오연상 등 진실을 드러내는 데 기여한 여러 평범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재구성하였습니다. 이 영화는 당해 연말 흥행 1위를 기록하며 사건을 젊은 세대에게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마무리

1987년 1월 14일, 스물한 살의 청년 박종철은 차가운 조사실의 물속에 머리가 강제로 밀려 들어가는 고문 끝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권력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어처구니없는 거짓말로 진실을 영구히 묻으려 하였습니다. 안기부·검찰·법무부·청와대 비서실이 총동원된 조직적 은폐 공작이 가동되었고, 시신은 가족의 동의도 없이 화장되어 강물에 뿌려졌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살아남았습니다.

검찰 간부의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를 포착한 기자의 예리한 촉각, 고문의 흔적이 역력한 시신 앞에서 협박과 회유를 물리치고 사실을 증언한 의사와 부검의의 용기, 좁은 감방 안에서 진실을 쪽지에 담아 담장 밖으로 내보낸 수감자와 교도관들의 결단, 그리고 추모미사 단상에서 온 국민을 향해 진실을 선포한 신부의 목소리가 하나씩 결합되어 거대한 권력의 거짓말을 무너뜨렸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 쟁취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동시에, 국가 권력이 시민의 생명과 진실을 어떻게 유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기록이기도 합니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의 죽음이 남긴 역사적 교훈을 잊지 않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박종철 열사에게 드릴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일 것입니다.